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
Critic/Review 2008년 07월 13일 21시 16분

-촛불 봉기의 ‘승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다중의 전위적 기획인가?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인가?


지난 주 종교인들의 ‘감동적인’ 동참, 그리고 이어지는 7월 5일의 대규모 ‘평화집회’는 두 가지의 서로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부의 끈질긴 버티기 혹은 공안탄압에 의해 지쳐가고 있던 촛불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다중의 전위적 활력과 차이의 생산을 거세하는 ‘국민화’ 기획의 완성이기도 했다.


물론 이 기획은 지난주에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기획 - 다중의 전위적 기획과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이하 전위적 기획과 국민화 기획) - 은 삶정치를 매개로 지속적으로 부딪히면서 공존해왔다. 5월 2일의 청소년들의 봉기, 24일의 대책위 주도의 집회로부터의 이탈과 거리행진, 갖가지 구호로 무장한 대중의 다종다양한 ‘자기표현’으로서의 가두시위의 모습, 막으면 돌아가는 떼 지성의 흐름, 지도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등이 전자의 한 예라면, 대형무대의 설치, 구호의 단일화, 방송차의 행진 지도, 각종 ‘국민 대토론회’, 시위대를 호명하는 ‘국민’ 호칭, 조금씩 시도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부와의 협상, 국회등원요구 등은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기획의 수행자는 결코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때로는 전위적 기획을 수행하고, 다른 때는 국민화 기획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 동시에 두 가지 기획이 함께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두 기획은 명시적이고 언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근본에서 작동하는, 말하자면 ‘힘(혹은 욕망)의 흐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화 기획의 완성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촛불봉기 내에서 ‘국민화’의 기획을 이끌어 온 “국민대책위”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촛불봉기에서 ‘국민화’의 기획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초월적 수준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국민’으로의 통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6월 10일의 대규모 행진으로 본격화된 이러한 국민화 기획은 정부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촛불봉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부는 대규모의 촛불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퍼포먼스를 벌이자마자 전열을 가다듬고 농성전과 공안탄압에 나섰다. 그것은 여러 방향으로 흐르던 힘이,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힘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6월 10일에 크게 한 번 터져나온 외침 이후로도 대형 집회는 이어졌지만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리한 반복일 뿐이었다. “대형집회하면 명박산성 쌓으면 되고, 촛불의 ‘숫자’가 줄어들면 공안탄압하면 되고~♪” 경찰 측의 오바스런 폭력행위가 종교인들을 끌어내긴 했지만 그것이 전반적인 흐름을 역전시키진 못했다. 촛불봉기는 이제 국가에 대항하는 저항적 ‘국민운동’으로 단일화되었다.



혁명을 망각하기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촛불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특히 인권활동가들을 비롯하여 봉기의 전위적 기획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지난 5일의 집회 이후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6.10에 이어 또 다시 50여 만 명이 모였으나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생성하는 사건을 만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만연하고 있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이미 유통까지 되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이 바로 이 거리의 주인이며,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초창기 봉기의 그 충만함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입을 쳐다본다. 사제단 신부님의 입, 대책위 활동가의 입, 또 누군가의 입. 그리고 이제 누군가 “우리 국민”의 저항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게 대책위 때문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정서를 극복하도록 이끌기보다는 더욱 더 큰 무력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망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혁명’을 망각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혁명’이라는 단어에서 정권탈취를 떠올린다. 응집된 인민권력이 단번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과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청와대로 가자!”, “차벽을 넘자!”는 외침과, 그것을 위한 직접행동들(줄다리기, 토성 쌓기) 이외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좀 더 넓게는 저녁의 촛불집회와 가두시위 외에 이 봉기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실천을 기획하지 못하는 건 “다중”을 말하고, 상상력과 전위를 논하는 이들조차도 이 봉기를 기억속의 ‘혁명’ 속에 억지로 끌어 맞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억 속의 혁명과 현실의 갭 사이에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은 “다중”적이어선 실현될 수 없는 기획이다. 혁명 지도부의 확고한 지도 아래 인민이 한 몸이 되어 응집된 폭력으로 국가를 뒤집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혁명을 원한다면 당장 구체적으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장비(어쩌면 무기!)를 동원하여 명박 산성을 무너뜨리고 청와대와 정부청사, 국회로 행진하여 지배자들을 무장해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선언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 경우 어쩌면 군대와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중의 봉기라는 형태로 시작된 이 국면이 이런 식의 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음을(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아가서도 안 됨을) 인정해야 한다.



승리의 충격


촛불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달 전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우린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승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그레이버의 논의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 역시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의 반세계화/반전 투쟁에 참가하면서 우리와 같은 문제 - 패배감의 만연 - 에 부딪혔다. 그는 패배감의 이유를 운동의 단기적 목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중기적 목표는 너무나도 빨리 달성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는다. 여기서 단기적 목표란 -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면 - 특정 서밋(IMF, WTO, G8 등)을 저지해서 철폐하는 것을 말하고, 중기적 목표란 워싱턴 컨센서스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고 각종 국제기구들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직접 민주주의운동의 모델을 보급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적어도 급진적인 운동의 분파에게) 최종적 과제는 국가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제는 최종적 과제가 중기적 과제의 빠른 성공과 단기적 과제의 실패로 인해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단 몇 년 사이에 전지구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실제로 IMF, 세계은행 등이 가진 자본금이나, 이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남미의 경우 이제는 거의 IMF없는 남미를 상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하지만 그들의 단기적 목표는 거의 대부분 실패한 것이었다. G8 회담이나 WTO회담은 어찌되었던 무사히 열렸고, 경찰폭력은 단호히 시위대를 막았다. “반테러”의 명분으로 각국의 공항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패는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기적 목표에 대한 운동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운동을 분열시켰다. 구 좌파는 구 좌파대로 자신의 혁명이상에 이 운동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물러나고, NGO들이나 종교단체는 “자본주의 폐지”라는 좌파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해 물러나며, 아나키스트들을 비롯한 직접행동 그룹들은 그 과정에서 패배감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최종적 목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만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직접행동 그룹이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혁명이란 단번에 국가 단위(혹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국가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폐절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실제 승리한 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자본주의 바깥의 삶, 국가 바깥의 삶을 살며 그러한 삶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승리들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타도되는 하나의 순간, 즉 명확한 단절이라는 옛 견해의 이면은, 그에 모자라는 어떤 것도 진정한 승리는 전연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여전히 건재한다면, 그리고 한 때 전복적이었던 견해를 팔아치우기 시작한다면,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이겼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중략)... 내게 이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이 페미니스트 책과 영화, 그리고 다른 상품들을 마케팅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페미니즘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한 방에 타도하지 않는 한, 이것은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징표다. 어쩌면 혁명을 향한 실질적인 길은 무한한 흡수의 순간, 무한한 승리 캠페인의 순간, 무한한 작은 반란의 순간 또는 무한한 탈주와 조용한 자율의 순간을 포함할 지 모른다. (중략)...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가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며, 사실상 약간은 이겼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 우리는 상당히 많이 이기고 있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 더 우리가 거둔 성과들을 분명한 승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혁명”은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조정환은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대중화시키고 있다.

 2) 수구적인 이데올로기적 권력기구 조중동의 권력을 침식하고 있다.

 3) 국가권력과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성하고 있다.

 4) 사회 각계각층을 반이명박 전선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5) 새로운 항쟁의 주체들을 생산하고 있다.

 6) 봉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매일 매일 창조하고 있다.

 (조정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또 촛불봉기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민의 상식” 목록도 있다.


 첫째, 헌법 1조 지켜져야 하며, 국민 원하면 대통령도 리콜해야 한다는 생각

 둘째, '배운여자'와 '배운남자'는 더 이상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생각 

 셋째,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조중동, 언론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생각

 넷째, '민영화'와 '자율화'는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다섯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이수연, <촛불과 함께한 두 달,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이 것 이외에도 수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이 모인 광장은 김밥과 생수가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뮌의 모델을 제시해주었고, 생협이나 대안학교 운동 등 그동안 ‘탈정치적 중산층 운동’으로 여겨져왔던 운동에 급진적 삶정치의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조합원 수가 늘어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무슨 일만 생기면 법원, 인권위, 헌재만 바라보던 사회운동이 다시금 직접행동의 능력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그 과정에서 집시법은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두 달 전의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성과들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사 지금 우리가 공안정국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미국산 쇠고기가 제대로 된 검증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가 이룬 이 성과 위에서 이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승리로 인식하고 더 많은 승리로 과감히 나갈 때 가능한 것이겠지만.



요구되는 상상력 - 대중집회를 넘어 소수 정치로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집회는 이제 광우병 쇠고기 반대 내지는 몇 가지 핵심 이슈들만이 이야기되는 ‘국민저항’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 이슈 바깥의 주장, 또한 국민 바깥의 주체성들을 배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봉기의 형식 역시 “대형무대와 방송차, 말하는 지도부와 듣는 청중”의 질서로 배치되고 있다. 나는 과감히 이런 식의 촛불 집회를 포기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더 이상 집회를 나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봉기에 있어 유일한 직접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중집회의 안팎에서 현재의 봉기 형식, 주체성, 내용 모두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청와대로 가는 거보다는 이미 우리가 2달 동안 점유한 거리 그곳에 대한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낙서, 목소리들이 설치 미술이 되고 있는 그곳. 밤마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것. 아예 그곳에서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듣는 것이 당연한곳으로 .. 원봉(주: 원천봉쇄)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난장을 벌이고 지구에 대해 삶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다. 언제나 이 썩은 사회를 향해 시위하는 곳으로 그곳의 의미를 점유하고 공간을 점유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미 그런데 그걸 더 의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할거 같다. 승리했네 승리할 꺼네 이런 소리보다는 말이야.(진보넷 블로거 달군, <거리점유>, http://blog.jinbo.net/dalgun/?pid=1249)


이러한 형식 속에서 아직 표현되지 않는, 혹은 이미 배제되어버린 다양한 소수적 외침들을 외쳐야 할 때이다. 집회 초기부터 열심히 결합하고 있는 한 성소수자 활동가는 “촛불집회 사회자가 ‘촛불 소녀 오셨습니까?’, ‘노동자 여러분 오셨습니까?’, ‘유모차부대 오셨습니까?’라고 참가자들을 호명할 때 ‘성소수자 오셨습니까?’라고 외치는 걸 상상하곤 해요.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찜찜한 기대를 동시에 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찜찜한 기대”란 이미 그 장이 “국민”의 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하나로 호명되는 것도 찜찜한 것일 테고, 또 그 ‘국민’들이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찜찜함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들이 말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공간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이 촛불의 공간이 “모든 이들이 모든 능력을 표현하며, 모든 요구를 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촛불’은 저녁의 촛불집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터가, 학교가, 또 그밖에 다종다양한 우리의 삶터 모두가 촛불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저녁의 촛불집회를 이러한 소수 정치의 공간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솔직히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방송차를 경찰이 탈취했을 때 한편으로 환호하기도 했었다. 촛불집회는 다시 지도부 없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경찰의 방송차 탈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힘의 분출로서 그리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 - 즉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성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 - 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와 입시지옥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외침이, 노동과 삶의 불안정화에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이, 주거권을 요구하는 빈민과 노숙인들의 외침이, 장애를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장애인들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그들의 삶터와 촛불집회의 현장 모두에서 외쳐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승리들을 만들고, 또 그 승리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통의 세계를 창조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참일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

-교육감 선거에 대처하는 소수 정치를 위하여


이 글에서 이러한 소수 정치의 직접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곧 열리게 될 7.30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에 두고 한 가지만 제안을 해 보고 싶다.(혹은 하나의 낮 꿈을 꾸고 싶다.) 이 싸움에서도 두 가지 기획 - 국민화 기획과 전위적 기획 - 은 충돌하고 있다. 국민화 기획은 이미 밑그림이 그려졌지만(시민사회진영의 단일후보 지지운동) 전위적 기획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선거에 대응하는 국민화 기획 속에서는 정작 교육감 선거로 인해 가장 크게 삶을 좌우당할 ‘청소년’이 배제당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그간의 촛불집회에서도 체계적인 배제를 경험해야 했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 “청소년은 10시가 되면 자율귀가 합니다.”라는 촛불집회 사회자의 망언(이게 망언이 아니면 무엇인가!)은 이들이 최초의 봉기자가 되어 마련한 공간을 이들에게서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청소년들은 투표권도 없는 교육감 선거를 통해 이들의 삶의 문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낮꿈을 꾼다. 청소년들과 “청소년-되기”를 하는 많은 이들이 이 선거를 “우리의 삶을 어른들에게 맡길 수 없다. 투표권을 달라!”고 외치는 또 다른 봉기의 장으로 삼기를. 물론 ‘투표권 요구’는 현실가능하지도 않고, 또 투표권 자체가 운동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투표권은 사실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삶정치의 한 표현일 뿐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에게 소위 “교육운동”을 한다는 전교조 등의 운동가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수능 대신 내신을 강화하자는 그들의 운동은 청소년들에게는 또 하나의 지옥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너희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또 자기들의 대표를 세워 교육문제를 해결하자고 하고 있다.


교육감 선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봉기를 꿈꾸며, 그들의 봉기에 결합하고 싶다. 이 운동을 7월의 “투쟁 과제”의 하나로 제출하는 바이다.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우리의 새로운 삶을 함께 즐기자!



<참고자료>

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http://blog.jinbo.net/redscaled/?cid=14&pid=405


조정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낸 새로운 유형의 혁명>

http://blog.daum.net/nalsee/15989295

-이 블로그엔 거의 매일 집회에 참가하는 조정환 선생님의 뜨거운 성찰이 가득가득

 한 보따리^^


이수연, <촛불과 함께한 두 달,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40219


우리 동네 닭장차벽
삶-雜說 2008년 06월 25일 12시 11분

우리집에서 청와대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다.
경찰은 매일 매일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인 정독도서관 앞 길을 막는다.
경찰이 막으면 동네 주민들도 차를 타고 못 들어간다.

시위대도 없는 그 길을 무조건 막고 보는 식이다. 일체의 유도리도 없다.
그 과정에서 지휘관은 주민들과의 트러블 처리를 모조리 전/의경들에게 맡긴다.
그러고 지들은 편하게 앉아서 쉰다.

사랑해 마지않는 단골 카페가 정독도서관 바로 맞은 편이다.
간만에 일요일 저녁 시위를 쉬고 카페에서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으나
경찰이 나를 열받게 했다.

한 시간 정도였나?  1인 시위(?)를 했다.
욜라 시끄럽게~
주 타겟은 지휘관.ㅋ

그제서야 위에 무전 치고 차를 빼더라.  

재미있는 건, 시위가 길어질수록 주민들은 시위대보단 경찰을 더 원망한다는 것.
정말 모든 운전자들이 한 마디씩 경찰들을 향해 욕을 던지고 가더라는.ㅡㅡ;


미래가 과거가 되어버린

이 혁명의 시간을 살기 위하여



김강기명_blog.jinbo.net/minjung





1. 사건


5월 2일, 여고생들이 중심이 된 광우병 쇠고기 반대시위가 시작된 이후로 이전에 지식인들이 쏟아냈던 수많은 미래에 대한 전망(그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전망이 '해석'이 되어버린 이 난감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 할아버지 음성을 꿈결에 들었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빨리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일이다. 전망하고 해석하는 신체에서, 변혁하는 신체로. 그러나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 한 달여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는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랑시에르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주체"론에서부터 네그리의 다중론까지, 혹은 웹 2.0이라는 틀로 분석한 세대론적 고찰까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는 전망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언정 변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인들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변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변혁은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 위에서 다시 "누가 변혁의 주체인가?" 이 사건에 참여하는 너, 나, 우리 모두가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사건이 존재에 우선한다.


물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건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사건이란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쫓아다니고 PC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갑자기 모일 때(5/2), 공연이나 보고 자유발언이나 듣는 "촛불문화제"가 몇 주씩 이어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로 쏟아져 나갔을 때(5/24), 시민들을 보호하는(혹은 그랬다고 생각했던) 경찰이 시민들을 공격할 때(5/25), 물대포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 물대포가 쏟아질 때(5/31), 닭장차에 끌려가야 할 시민들이 스스로 닭장차에 오를 때, 며칠 째 시위대를 가로막은 차벽과 컨테이너 앞에서 장시간의 논쟁을 거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 권력을 조롱할 때(6/10)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하나씩 벌어질 때마다 국면은 전환되었고, 권력자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시위대의 힘은 커져 갔다.


"시민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는 것 보다(실제로 갈림길이 나타나면 우왕좌왕합니다) 경찰들이 어떻게 연행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로에서 시민들이무작정 연좌시위를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가능한 시위대를 보호하며 투쟁을 이끄는 합리적인 지도부가 존재한다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 허재현, <다함께에 글을 남기신 김강기명님께>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발성'이 아닌가요? 도무지 예측불가능한 대중의 움직임, 방패로 위협하고, 연행해도 꿋꿋하게 '나를 잡아가라!'며 스스로 닭장차에 오르는 불가해적인 대중의 위대함이 바로 권력을 떨게 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대중이 일사분란하고 질서 있게 행동한다 해도 그것은 권력에겐 별 볼 일 없는 일일 뿐입니다. 당장 언론을 보십시오.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거리로 나오게 이끄는 건 바로 '사건'이지 그저 일사분란하기만 한 '질서 있는 행진'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그것이 기사가 되어 정부와 경찰을 당황하게 하고, 또 시민들 스스로 놀랍게도 자신들을 억제하면서도 창조적으로 나가는 광경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들이 '사건'이고, 권력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우리의 힘입니다."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6월 10일을 전후하여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촛불은 잦아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렇게 분출된 힘을 담아낼 정치적/정책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최장집 같은 이는 속히 정당정치를 복원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한홍구의 말을 따라 "국회에 맡기느니 차라리 천일기도를 하겠다." 사건들은 좀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건들을 창조할 상상력과, 그것을 실천할 강철의 체력이다. 이미 대중은 청와대로의 행진이 막힌 곳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고 전선을 넓히고 있다.



2. 전위


전위란 이런 상상력과 체력의 주체다. 즉 전위는 대중을 결집하여 이끄는 주권적 명령형식이 아니라 대중의 흐름이 몰화되지 않도록 분열을 조장하는 자, 대중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 '여러 방향'을 제시하는 자, 곧 '소수적 흐름'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놀랍게도 이번 시위에서 대중들은 어떤 이들이 전위인지를, 그리고 어떤 이들이 전위가 아닌지를 명확하게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무엇보다 "다함께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24일에 시위대가 청계광장을 벗어나 행진을 벌이기 시작하자 26일, 소위 "운동권"들 중에서 <다함께>가 가장 먼저 개입을 시도했다. <다함께>는 대책위가 사실상 방임하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며 스스로도 행진의 맨 앞에서 구호를 선창하며 진로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들의 개입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전체 시위대 일각에선 심지어 이들에 대한 각종 비토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다함께>는 조직된 대오가 앞에서 이끌어야 행진이 질서 있고, 위력이 있을 것이며, 연행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다함께(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된 대오)가 없었던 24일과 25일의 집회 역시 질서 있었으며, 위력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연행'은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다함께>가 행진을 이끌다가 경찰과의 충돌이 우려되는 지점에서 자신들만의 결의로 해산하는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프락치론"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이 지점이 현재 시위대의 연대를 부분적으로 훼손하고 있는 프락치론의 시발점이었다. <다함께>는 일부 네티즌들이 이들의 좌파적 성향을 문제 삼고 색깔론 마녀사냥을 벌인 것에 격노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부수적인 일면에 불과하다.(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다함께> 비토 사태의 본질은 이들의 지도에 대한 대중의 거부에 있다. 다만 그 방법이 아직은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대중의 <다함께> 경험은 기타의 다른 모든 운동조직의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자유발언대가 열리기만 하면 대책위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이들이 운영하는 방송차가 대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이 가장 컸다. 이번 시위에 나타난 대중들의 표현욕구와 그 능력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기존의 조직된 운동권이 가진 조직론과 시위에 관한 관성은 끊임없이 대중과의 불화를 겪었다.


"어제 방송차 마이크를 잡고 외치시던 여성 활동가분은 솔직히 지나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책위의 안내를 받으셔야 합니다!'라니요. '상황실의 정보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라니요. 우리들은 상황실이 없어도 이미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정보를 다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히려 방송차가 앞으로 나갈 때마다, 시민들은 움직이려 하는데 앉자고 할 때마다,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질서였고, 방송차가 혼란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중은 소위 "운동권"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시위가 교착상태에 다다르자 "대학생들은 뭐하는가?", "노동자들은 총파업이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닌가?"하는 요구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지도"를 원한다기보다는 전술한 의미에서의 "전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교착상태를 돌파하여 사건을 만들어줄 전위에 관한 한 대중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에 보내는 "성원"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촛불집회가 이어질수록 운동권과 일반 시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조끼를 벗고 일러스트가 그려진 귀여운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아고라를 중심을 모인 네티즌들이 마치 '운동권'처럼 조직을 구성하고 커다란 깃발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그러면 또 "아고라가 권력화 되었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권위가 사라진 지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운동권과 그 바깥에 있던 시민들의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연대는 결코 부드럽고 평화롭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예비군 논쟁이나 비폭력 논쟁 등의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체의 변환을 요구하는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도 변하고, 지식인-운동권도 변한다.


즉, 지금의 촛불집회 국면에서는 그 어떤 정치조직도 대중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가 없다. 대책위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몇몇 정치조직들의 헤게모니 싸움은 대책위 바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대책위 내부에는 한국진보연대나 다함께 등의 "인민전선론", "전민항쟁론"의 입장에 서 있는 단체들과 안티2MB카페 등 '진보적 국민정당'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옛 노무현 지지그룹들의 대립이 존재한다.) 현재 필요한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위'(아방가르드)다. 전선은 더 넓어지고, 이슈는 더 다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중이 요구하는 '전위'는 바로 그 사건의 주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운동조직들의, 혹은 대중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3. 정치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1조"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것처럼 이번 시위가 "공화주의의 회복" 혹은 "발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할 어떤 "정치적인 것"(공화주의적이고 대의적인)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까?


대중의 공화주의적 요구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의도하거나 결정한 바 없이 진행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흐름에 대한 공포와 훼손당한 자존심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정부나 축산자본이 반복적으로 "촛불집회는 한국의 국내문제"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지속적으로 쇠퇴해 왔다. 이명박의 당선은 정치가 보수화되고 있는 증거라기보다는 정치의 행정화, 혹은 행정권력이 정치권력에 대해 거둔 최종적 승리의 증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는 세계 경제체제, 세계 주권체제에 포섭되어 있으며 따라서 밖으로는 한 없이 약하고, 안으로는 한 없이 강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대중의 삶에 부과된다.


따라서 대중의 저항은 그것이 일국적 요구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또한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 역시 국가주의라기보다는 대안적인 삶의 조직화에 대한 갈망에 더 가깝다. 내 삶을 내가 직접, 그리고 내 이웃과 더불어 직접 꾸려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공화주의적 정서의 표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위 현장이 이미 수십만 명이 모여도 생수와 김밥이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뮨"이 되어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이 꺼질 것을 염려하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정상적 국민국가"를 무덤으로부터 다시 소환하는 일이 아니다. 정치의 장소가 정치적인 것 바깥의 삶 그 자체라면,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정치는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며칠 전에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인권침해를 고발하며 전교생이 수업거부에 들어간 사건이나 시위대가 한강을 넘어 공영방송 수호를 외치며 여의도로 행진한 사건은 촛불이 진화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의 모든 요구가 촛불이 되어야 할 시점이다. 착취가 일어나는 모든 장소에서, 억압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서 촛불이 켜지는 것이 먼저이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쉽사리 개헌이나 대의제 민주주의의 변화를 통해 다중의 분출을 봉합/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지속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의 연대를 이뤄내는 일이다. (중략)... 이러한 전지구적 대중의 연대를 위해 좀 더 우리의 활력을 이어갈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또 운동단위들을 만들고 키워가는 일이다. 제헌의회든, 국민정당의 건설이든, 이 모든 것은 이 에너지의 총체가 아니라 잉여로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항상, "제헌된 권력"보다 "제헌하는 역능"이 우선한다.

촛불은 미래였던 것을 과거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특히 지식인들이 할 일은 좀 더 과감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과감히 68년과 87년을 망각하는 것이다. 더 많은 상상력으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사실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결코 아닐 것이다. 자, 무엇을 하면 좋을까? 일단 빈집이 되어버린 시청 청사를 점거해보는 건 어떨까?